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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믿음에서 나와 믿음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가 이 복음에 계시되어 있는데, 이것은 성경에 "의인은 믿음으로 생명을 얻고 살 것이다."라고 기록된 것과 같습니다. - 롬 1:17

복음과 진리 #2 - 나인성의 과부

작성  광주교회   등록  2016.03.11 16:31:22   조회  187


나인성의 과부.jpg

나인 성의 과부

 

■ 성경: 누가복음 7:11-16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 제자와 허다한 무리가 동행하더니, / 성문에 가까이 오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그 어미의 독자요, 어미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신매 /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미에게 주신대 /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아보셨다 하더라.

 

1. 과부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때로는 목자와 양의 관계로 말하기도 하고, 때로는 조물주와 피조물의 관계, 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말하기도 한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7장에서는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를 남편과 아내의 관계로 비유하고 있다. 이사야 54:5절은 너를 지으신 자는 네 남편이시라고 말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같다.

당신은 온 성경이 하나님과 사람의 달콤한 사랑의 이야기임을 본 적이 있는가? 성경은 결혼 이야기로 시작해서 결혼 이야기로 마친다. 창세기 2장에는 아담과 하와의 결혼식이 있는데, 이때는 아직 죄가 세상에 들어오기 전이다. 아담과 하와의 결혼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에 대한 상징이다. 또한 계시록 21장에서는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신랑을 위하여 단장한 것처럼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장면을 말하고 있다(계 21:2, 9-10). 성경은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와의 결혼으로 마친다. 온 성경은 결혼으로 시작해서 결혼으로 마치는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이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읽은 구절에서는 과부가 등장한다. 과부는 남편을 잃었거나 남편과 헤어진 여자를 말한다. 그러므로 과부는 남편이신 하나님을 떠나고,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다.

과부는 남편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의지가 없다. 원래는 남편이 아내의 의지였다. 그러나 이제 남편이 없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운 일을 만날 때 의지할 곳이 없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이 이와 같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혼자서 모든 일을 해결하고, 감당해야 한다. 아무도 힘이 되어 줄 사람이 없다.

또 남편을 잃은 과부는 외롭다. 아무리 친구나 친척이 많아도 옆에 남편이 없으면 무엇을 해도 외로운 것이다. 아무리 좋은 옷을 입고, 즐거운 곳에 놀러가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이 외롭다.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도 얼마나 외로운가? 많은 친구가 있고, 동료들이 있지만, 수많은 군중 속에서도 사람은 여전히 외로운 존재이다. 결국 부모님, 친구 모두가 하나씩 내 곁을 떠나고 나 혼자 남는 것이다.

남편 없는 과부는 보호가 없다. 모든 사람에게 멸시 당하고, 무시당하고,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 직장에서, 또는 학교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당신을 무시하고, 얕잡아 보는가?

또한 남편이 없기 때문에 과부는 약하다. 원래는 남편이 과부의 힘이 되었지만, 이제는 남편을 잃어버려서 조그만 일에도 넘어지고, 쉽게 상처를 받는다.

또한 남편 잃은 여자는 소망이 없다. 소망인 남편을 잃었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소망이 없다. 무엇이 당신의 소망인가?

 

 

2. 독자

이러한 과부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다. 남편이 없기 때문에 이제 과부의 유일한 소망은 하나 뿐인 아들이었다. 이 아들이 과부의 의지이고, 보호이고, 힘이 되었다. 아마도 그 아들은 그 집의 대들보였을 것이다. 과부는 이 하나 뿐인 아들을 위해 어떤 고생도 다 참을 수 있었고, 아들에게 모든 기대와 소망을 걸었을 것이다. 아들이 아프면 자신이 아픈 것처럼 잠도 못자고 괴로워 했고, 아들이 재롱이라도 부리면 모든 괴로움을 잊을 정도로 기뻐했을 것이다. 과부는 남편에게서 얻지 못한 것을 이 하나 뿐인 아들에게 다 기대하고 살았을 것이다. 이 아들이 잘 성장해서 자기를 보살펴 주리라 기대하고 모든 것을 아들에게 다 쏟았을 것이다.

 

3. 독자의 죽음

그러나 과부의 유일한 소망이고, 대들보였던 이 독자가 일찍 죽었다. 남편을 잃고 과부가 애지중지 키우던 독자가 갑자기 죽어버린 것이다. 이 아들이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어머니의 기대를 다 채워주었으면 좋았겠지만 이 아들은 청년 때에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이제는 다 키웠구나, 이제는 고생 다 했다라고 생각했을 때 갑자기 이 아들이 죽은 것이다. 유일한 소망이던 독자가 죽었을 때 이 과부는 더 이상 살 힘이 없었을 것이고, 아마도 아들을 따라서 같이 죽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

모든 사람에게는 자기의 「독자」가 있다. 하나님을 떠난 당신의 독자는 무엇인가? 건강이 우리의 독자이고, 재물이 우리의 독자이며, 또 명예나 학식이 우리의 독자이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과 의지이던 독자는 일찍 죽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일생 동안 소망 삼고, 기대했던 것들이 얼마나 빨리 사라지는가? 일생을 거쳐서 힘을 다해서 성취한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물거품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하나님을 떠나서 사람은 애써서 많은 것을 성취해보지만 그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져 버린다.

 

4. 두 행렬

이제 사람들이 관을 메고 무덤을 향해 가고 있다. 어머니의 유일한 소망이요 기쁨이던 독자를 땅 속에 묻으려 가고 있다. 관이 앞장을 서고, 그 뒤를 어머니가 울며 따르고, 많은 친구와 친척들, 또한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 하며 무덤을 향해 가고 있다. 인생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인생이란 날 때부터 죽음을 가지고 나와서 일생동안 눈물을 흘리며 결국은 종착지인 무덤을 향해 가는 것이다. 사람들은 생일을 축하하지만 사실상 한 해 한 해 생일이 돌아올수록 점점 더 죽음을 향해 가는 것이다. 10년, 20년, 30년을 살아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실상은 그만큼 죽어온 것이다. 계속 죽어가다가 결국은 마지막 숨을 몰아쉴 때 죽음의 결과에 도달하는 것이다.

관을 따라 무덤으로 가는 행렬 가운데에는 많이 배운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그 성에서 돈이 많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학식이 많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가 다 무덤을 향해 가는 것이다. 누구도 이 행렬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나는 나이를 먹기 싫어도 세월이 등을 밀어내는 것이다.

당신의 종착역은 어디인가? 당신이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많이 배운 사람이든 배우지 못한 사람이든, 지위가 높은 사람이든 낮은 사람이든,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결국 당신의 종착역은 무덤이다.

그러나 여기 또 하나의 행렬이 있다. 한 행렬은 관이 앞장을 서서 무덤을 향해 가고 있지만, 무덤을 뒤로 하고 반대 방향으로 오고 있는 또 하나의 행렬이 있다. 무덤을 향해 가는 죽음의 행렬에서는 관이 앞장을 서서 인도하고 있지만, 여기 또 하나의 행렬은 주님이 제일 앞에서 인도하고 있다. 관 뒤에는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따라가고, 죽은 아들의 많은 친구와 친척들이 애통하고 슬퍼하며 따라가고 있지만,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환한 얼굴로 주님을 따르고 또 그 뒤의 많은 무리도 다 즐겁게 따라 가고 있다. 사도행전 3:15은 주님이 생명의 인도자라고 말한다. 주 예수님은 생명의 인도자요 창시자이다. 그러므로 우주 가운데 두 행렬이 있다. 하나는 관을 따라가는 죽음의 행렬이고, 또 하나는 생명의 인도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생명의 행렬이다. 이 두 행렬 외에 제 삼의 행렬은 없다. 당신은 지금 어느 행렬에 속해 있는가? 당신이 죽음의 행렬에 있지 않다면 생명의 행렬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행렬에 속해 있지 않다면 자동적으로 죽음의 행렬 가운데 있는 것이다. 다른 선택은 없다. 두 행렬 중 하나에는 반드시 속해야 한다. 지금 자신을 점검해 보라. 당신은 지금 어느 행렬에 속해 있는가?

 

5. 구원의 정의

이 두 행렬의 그림에서 우리는 구원의 정확한 의미를 알 수 있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이란 죽음의 행렬에 속해 있으면서 그 안에서 행위를 고치고, 착한 일을 하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구원이란 죽음의 행렬에서 생명의 행렬로 옮기는 것이다. 행렬이 바뀌는 것이다. 구원이란 죽음으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다가 생명으로 가는 기차로 바꿔 타는 것이다. 구원은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고, 윤리나 도덕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심지어 구원이란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과 죽음의 문제인 것이다. 당신이 착한가 악한가, 부자인가 가난한 사람인가, 많이 배운 사람인가 아닌가는 전혀 관계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당신이 지금 어느 행렬에 있는가이다. 당신이 아무리 좋은 사람이고, 선행을 많이 했어도 지금 당신이 죽음의 행렬에 속해 있다면 당신의 종착역은 죽음이다. 구원은 죽음의 노선에서 생명의 노선으로 옮기는 것이다.

 

6. 구원 받는 길

그러면 어떻게 죽음의 행렬에서 생명의 행렬로 바꿀 수 있는가?

 

(1) 예수님이 오심

먼저 예수님이 오셔야 한다. 누가복음 7:1은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새라고 말한다. 우리는 내가 먼저 하나님을 찾았고,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 앞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오시는 것이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 앞에 갈 수 없고, 산 사람이 죽은 사람에게 오는 것처럼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방문하셨다. 11절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방문하셨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죽음 가운데 있는, 죽음의 행렬에 속해 있는 그분의 백성을 방문하셨다. 이것이 구원의 첫 번째 단계이다.

 

(2) 불쌍히 여기사

주님이 오셔서 눈물을 흘리며 관을 따라가고 있는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 누구도 과부의 마음을 위로할 수 없고, 그 눈물을 닦아줄 수 없었지만 주님이 오셔서 그를 불쌍히 여기셨다. 아 이것은 우주 가운데 최고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부모의 사랑보다 뛰어나고, 애인의 사랑을 초월하며, 친구의 우정보다 뜨거운 사랑이다. 이런 절망 가운데, 죽음 가운데 있는 사람을 누가 사랑할 수 있는가? 그러나 여기 모든 절망과 슬픔과, 심지어 죽음까지도 뛰어넘는 놀라운 사랑이 있다.

 

(3) 울지 말라

주님은 다만 과부를 불쌍히 여기실 뿐 아니라 울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오, 이 음성을 들어보라. 울지 말라. 이것은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는 주님의 음성이다. 이 세상에는 참된 사랑이 없을 뿐 아니라, 참된 위로도 없다. 당신이 마음이 상하고, 슬픈 일을 만나고, 심지어 죽고 싶을 때 누가 당신의 마음을 위로할 수 있는가? 초상집에 가서 무슨 말로 위로하겠는가? 사람의 위로는 다 겉치레이고 말뿐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울지 말라고 말할 수 있는 분이다. 그분만이 생명의 인도자이시고, 그분만이 죽음을 정복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에 죽음 가운데 있는 사람을 위로하실 수 있다. 여기 주님의 다정한 위로의 음성이 있다. 울지 말라. 이 음성을 들을 때, 그 사랑의 마음을 만질 때 당신의 마음이 위로를 얻을 수 있다.

 

(4) 관에 손을 대심

주님은 울지 말라하시고 관에 손을 대셨다. 관은 죽음을 상징한다. 관에 손을 댔다는 것은 죽음에 손을 댄 것이다. 인류 가운데 아무도 죽음에 손을 대고 살아난 사람이 없다. 어떤 영웅 호걸도 죽음을 만질 수 없고 죽음을 이길 수가 없다. 오직 생명의 주이신 주 예수님 만이 죽음을 만질 수 있고, 죽음을 다스릴 수 있다.

 

(5)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함

주님이 관에 손을 대시자 죽음을 향해 가던 그 행렬이 멈추었다. 인류 역사 이래 그 누구도 도도하게 흐르는 이 죽음의 흐름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제아무리 뛰어나고 권력이 있는 사람도 이 죽음의 흐름 가운데 다 휩쓸려 가버렸다. 그러나 주님은 죽음을 정복한 분이시기 때문에 이 죽음의 흐름을 멈추게 할 수 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외치신 분,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만이 이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실 수 있고, 죽음을 이기실 수 있다.

 

(6)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은 죽음의 행렬을 멈추게 하신 후에 그 죽은 청년에게 말씀하셨다. 주님이 이 땅에 오셨고, 과부를 불쌍히 여기셨고, 죽음을 정복하셨다 해도 이것만으로는 과부와 죽은 독자에게 구원이 될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이 없다면 구원이 없는 것이다. 주님은 죽은 자에게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의 말은 아무런 능력이 없지만 주님의 말씀은 영이요 생명이다(요 6:63). 사람의 말은 기껏해야 윤리적인 말이나 도덕적인 말이지만, 그분의 말씀은 생명의 말씀이다. 그분은 태초부터 있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시며, 그 말씀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들어있다(요1:4).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 죽은 자가 일어났다. 이 말씀을 들으라. 주님은 오늘도 말씀하시는 분이시다. 그분의 말씀을 들을 때,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는 그 음성을 들을 때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고, 죽었던 자가 살아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지, 행위를 고치거나 종교적인 형식을 지키는 문제가 아니다.

 

(7) 살아난 독자를 다시 과부에게 주심

주님은 죽었다가 살아난 독자를 다시 과부에게 돌려 주셨다. 죽었다가 다시 산 독자는 원래의 독자와는 다르다. 원래의 독자에게는 어머니로부터 받은 천연적인 사람의 생명만 있었지만, 이제 다시 살아난 독자 안에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 있다. 그러므로 이 독자를 받는 것은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하고 거룩한 생명을 받는 것이다. 구원이란 유한하고 타락된 사람의 생명 외에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받는 것이다. 이 생명을 받을 때 사망의 행렬에서 생명의 행렬로 바꿀 수 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이 생명을 받을 수 있는가? 요한복음 1:12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 것이고, 그 방법은 영접하는 것이다. 영접하는 것이 바로 믿는 것이며, 믿을 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다. 그러면 무엇을 믿어야 하는가? 그분의 이름을 믿는 것이다. 그분의 이름을 믿는 것은 그분의 이름을 시인하는 것이고, 그분의 이름을 시인하는 것은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로마서 10:13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한다. 주의 이름은 예수이시다. 당신이 입을 열어서 주 예수라고 부를 때 그분의 이름을 믿는 것이며, 그분을 믿는 것은 바로 주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럴때 당신은 구원을 받는 것이다. 자, 마음을 열고 입을 열어서 주 예수여, 주님을 제 안에 영접 합니다라고 불러 보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