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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진리 #10 -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함

작성  광주교회   등록  2016.03.11 17:50:25   조회  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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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격이신 그리스도를 사랑함

생명이 아닌 것들

온 성경은 생명의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성경을 윤리의 책이나 도덕의 책이나 어떤 종교의 교리를 기록한 책이라고 생각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오해한 것이다. 성경의 중심은 생명이다. 창세기 1장에서 우리는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기록을 본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의 중심은 생명이다. 그 후에 2장에서 하나님은 그분이 창조하신 사람을 생명나무 앞에 두셨다. 여기서도 우리는 「생명」이라는 단어를 볼 수 있다. 당신은 「생명」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겠는가? 생명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기 위해 우리는 먼저 많은 사람들이 생명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1) 생명은 지식이 아님

첫째로 우리는 생명이 지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지식은 생명과 다를 뿐 아니라 심지어 생명과 대립된다. 창세기 2장에 두 나무가 있는데 하나는 생명나무이고, 다른 하나는 선과 악에 관한 지식의 나무이다(창2:9, 원문참조). 여기서 우리는 생명과 지식이 전혀 다른 범주에 속했으며, 심지어 서로 대립되는 것임을 볼 수 있다.

특별히 기독교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지식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들은 성경 지식이 더 많아지는 것이 곧 생명이 성장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생명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생명이 무엇인가를 알고, 생명을 체험하기 원한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생명과 지식의 차이를 알아야 한다.

예를 들어 여기 우유 한 잔이 있다고 하자. 당신이 이 우유를 마시면 영양분을 얻고 생명의 공급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이 우유를 마시지 않고 분석하고 연구하기만 한다면 이 우유는 당신에게 생명이 될 수 없다. 우유에 대해 연구하는 것은 지식이지만, 우유를 마시는 것은 생명이다. 생명을 체험하기 원한다면 우유를 연구하거나 분석하지 말고 다만 마시라. 기독교의 역사는 한 마디로 지식으로 인한 분열의 역사이다. 우리가 생명을 주의하지 않고 지식을 주의한다면 끊임없는 분쟁과 분열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지식은 나누지만 생명은 하나되게 한다.

 

(2) 생명은 은사와 다름

또한 많은 사람들은 영적인 은사를 얻는 것이 곧 생명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은사는 생명과 다르다. 고린도전서 1:7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믿는이들이 은사에 있어서 어떤 부족함도 없다고 말했다. 그들은 모든 은사와 지식과 구변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에게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라고 말했다(고전3:1-3). 고린도의 믿는이들은 많은 은사를 가졌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여전히 어린아이였다. 이것은 당신에게 많은 은사가 있다 해도 여전히 생명이 어릴 수 있음을 증명한다.

아마 당신은 구약에 나오는 발람의 당나귀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이 당나귀가 어느날 사람의 말을 했다(민22:28-30). 이보다 더 참된 방언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그 당나귀는 여전히 당나귀였을 뿐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다. 다시 말해서 그 당나귀가 방언의 은사를 받았는지 모르지만 생명은 받지 못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이 방언을 말하고, 신유의 능력을 가졌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생명이 풍성한 것은 아니다. 생명은 지식과 다르며, 또한 생명은 은사와 다르다.

 

(3) 생명은 능력과 다름

우리는 또한 생명이 능력과도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에게 많은 능력이 있다 해도 여전히 생명이 어리고 부족할 수 있다. 구약에 있는 삼손을 예로 들어보자. 그는 매우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생명에 있어서는 여전히 부족하고 어렸다(삿16). 바울과 삼손을 비교해 보라. 삼손이 능력은 많았지만 생명에 있어서는 바울과 비교할 수 없다. 이와 같이 당신이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여전히 생명이 부족할 수 있다.

안타까운 것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지식과 은사와 능력에는 주의를 기울이지만, 생명에 관해 관심을 갖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성경의 중심이 생명이라는 것과, 이 생명이 지식과 은사와 능력과 다르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2. 생명은 한 인격임

그렇다면 생명은 무엇인가? 요한복음 11:25에서 주님은 나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시고, 14:6에서는 내가 곧…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골로새서 3:4은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생명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 한 인격이다. 우리가 처음 주 예수님을 믿을 때 영접한 그 생명은 한 인격이다. 당신은 인격과 생명의 차이를 아는가? 인격에는 의지와 갈망과 목적과 감정을 지닌 성품이 있지만, 생명은 이런 것들이 없다. 풀에도 분명히 생명이 있지만 그 풀에는 어떤 성품이나 의지나 목적이나 갈망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영접한 주 예수님의 생명은 단지 생명만이 아니라 한 인격이다.

우리가 영접한 것이 다만 생명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문제가 생긴다. 단순히 어떤 생명을 취하기는 쉽지만, 어떤 인격을 다루기는 쉽지 않다. 부부 사이의 거의 모든 문제는 그들이 서로 다른 성품들을 지닌 인격체라는 데서 비롯된다. 남편도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고, 아내에게도 독특한 개성이 있다. 이렇게 독특한 개성을 가진 두 인격들이 만날 때 많은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이신 주 예수님은 분명한 인격이시다. 우리가 인격이신 그분을 취하지 않는다면 결코 생명을 가질 수 없다. 요한일서 5:12은 이렇게 말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이 구절은 「아들의 생명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다」고 말하지 않고,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다」고 말한다. 아들은 한 인격이다. 그 인격을 취할 때 우리는 생명을 얻는다. 그리스도는 우주 가운데서 가장 강한 성품을 가진 인격이시다. 우리는 또 다른 생명을 소유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인격을 소유한 것이다. 유일한 인격이시고, 신성과 인성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제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 그분을 생명으로 취하기 위해 우리는 그분을 온 인격으로 취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갈2:20)고 말했다. 바울은 자신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산다고 말하지 않고 그리스도, 즉 한 인격이 산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자아의 옛 인격을 잊어버리고 새 인격이신 그리스도께로 돌이켜야 한다. 우리가 이 인격을 취할 때 우리 속에서 생명의 흐름이 흐를 것이며, 결국 이 흐름으로 인해 우리는 변화될 것이다. 본래 진흙덩어리인 우리가 보석으로 변화되는 유일한 길은 외적인 개선이나 결심이나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인격으로 취함으로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흐르시는 것이다.

 

3. 인격적인 접촉

이제 우리는 우리가 영접한 이 생명이 단지 생명이 아니라 놀라운 한 인격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할 일은 그분을 계속 접촉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계속적으로 접촉하고, 그분의 임재를 체험할 수 있는가?

성경에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부부의 관계에 비유된다. 그분은 우리의 신랑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신부이다. 신랑과 신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결혼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이 없이는 절대로 행복한 결혼 생활이 있을 수 없다. 주님 편에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분은 분명히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 문제는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가?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 관해 말할 때 당신 속에는 달콤한 느낌이 있는가? 그분을 생각할 때마다 당신의 마음이 끌리는가?

바울은 디모데전서 1:14에서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라고 말했다. 주님의 은혜는 두 방면에서, 즉 믿음과 사랑에서 풍성하다. 단지 주님을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요한복음 1:12은 영접하는 자,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한다. 당신은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가? 그렇다면 분명히 당신은 구원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이것이 전부가 아니다. 믿음에 관해 말씀하신 후에 주님은 우리에게 사랑을 요구하신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요14:21, 23). 주님을 믿는 것과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믿는 것은 다만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지만, 사랑하는 것은 당신이 영접한 그분을 누리는 것이다. 믿는 것은 슈퍼마켓에 가서 음식들을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는 것이라면, 사랑하는 것은 그것들을 요리하여 먹는 것과 같다. 당신이 주님을 믿었다면 주님은 지금 당신이 그분을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예를 들어 내가 성경 한 권을 당신에게 선물했다고 하자. 나는 당신이 다만 그 책을 받아 책장에 보관하기를 원치 않고 당신이 그 책을 사랑하고, 그 책을 읽으며, 그 책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기를 바랄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믿는 것보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더 깊은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가 믿음과 사랑과 함께 그에게 풍성했다고 말한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은혜이고, 그분을 사랑하는 것 또한 주님의 은혜이다.

갈라디아서 2:20에서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한 후에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덧붙였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여 더이상 우리 자신을 위해 살지 않게 하신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셨고 나를 위해 그분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이제 나도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으로 인해 사는 것이다.

참된 능력은 사랑 안에 있다. 사랑은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어머니의 사랑이 아니라면 자녀를 위한 그 모든 수고를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을 위해 어떤 것도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이 사랑은 심지어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위해 목숨을 버리게 한다.

 

4. 사랑함으로 누림

우리가 영접한 생명은 한 인격이다. 그리고 이 인격을 체험하고 누리는 길은 사랑 외에는 없다. 우리는 주님을 사랑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기도하자. 주여, 내가 당신을 사랑할 수 있도록 당신의 사랑을 보여 주소서. 일단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본다면 우리는 그분께 사로잡힐 것이고 매혹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그분을 사랑할 것이며, 그 결과 그분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생명이신 주님을 누리는 길이다. 주 예수님은 단순히 어떤 교리가 아니고, 은사나 능력도 아니며, 우리의 사랑과 애정과 존중이 필요한 인격이시다. 그러므로 그분을 체험하는 길은 사랑 외에는 없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을 알고, 많은 은사와 능력이 있지만 주님을 향해 차갑다. 주님이 우리의 생명이 되셨다고 말하면서 여전히 주님을 향한 뜨거운 사랑이 없다면 그분은 우리에게 단지 교리적인 분에 불과하다. 우리에게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는 있지만 생명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누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면 성경을 많이 알지 못해도 생명을 누릴 것이다.

당신이 어떤 사람에게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이 말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당신이 사랑하는 그 사람은 분명한 의지와 갈망과 목적을 가진 한 인격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진정으로 그를 사랑한다면 그의 갈망을 따라야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을 우리의 생명과 인격으로 취하려면 주님의 갈망을 우리의 갈망으로 취해야 하고, 주님의 의지를 우리의 의지로 취해야 한다. 인격이신 그분을 사랑하려면 그분의 성품을 취해야만 한다.

지금까지 당신은 신앙 생활에 관한 많은 가르침들을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주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 것도 통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가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로 여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자신을 죽은 자로 여겨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당신이 마음으로부터 주 예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당신의 성품을 나의 성품으로 취합니다라고 말한다면 노력할 필요도 없이 자신이 죽은 자임을 깨닫게 된다. 또 우리의 힘으로 아무리 거룩해지려고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나 당신이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고 고백한다면 무엇인가가 일어날 것이다. 백화점에서 화려하고 세상적인 물건을 잡았다가도 다시 내려놓게 될 것이다.

다만 주님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열어 놓으라. 다른 것은 다 잊어버리라. 교리와 은사와 능력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당신의 사랑 안에 나를 지켜 주소서. 당신 자신으로 나를 사로잡으소서. 당신의 사랑스런 임재 안에 있게 하소서. 우리가 깊은 속에서부터 주님을 사랑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당신에게 지혜가 필요하다면 그분이 당신의 지혜가 되실 것이고, 능력이 필요하다면 그분이 능력이 되실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시다. 다른 것을 구하지 말라.

교회의 타락은 주님을 향한 첫 사랑을 잃는 것부터 시작된다. 계시록 2장에서 주님은 에베소 교회에 많은 좋은 행위들이 있었지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을 책망하셨다(계2:4). 주님을 향한 신선한 사랑, 최고의 사랑을 잃어버리는 것이 교회의 타락의 시작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주님께 대한 사랑이 식어질 때 침체하기 시작한다. 우리 모두 주님께 나아가서 이렇게 기도하자. 주여, 저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사랑스런 당신 외에는 어떤 일이나 어떤 사람도 원치 않습니다. 당신을 위해 많은 일을 하기도 원치 않습니다. 저는 다만 당신을 사랑하기 원합니다. 주님을 나의 인격으로 취하기 원합니다. 당신의 갈망이 나의 갈망이 되고, 당신의 의지가 나의 의지가 되며, 당신의 성품이 나의 성품이 되기 원합니다. 이렇게 기도할 때 우리는 주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고, 인격이신 그리스도를 충만히 누리게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