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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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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명을 주시는 분은 그 영이십니다. 육체는 무익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한 말이 영이요 생명입니다. - 요 6:63

이기는 생명을 체험하는 길(1)

작성  광주교회   등록  2016.03.11 15:34:26   조회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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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

 

갈라디아서 2장 20절은 우리가 잘 아는 성경 구절이다. 오늘 오후 우리는 더 자세히 보기로 한다.

 

어제 여기서 우리는 이기는 생명이 무엇인가를 보았다. 우리는 이기는 생명이 그리스도이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임을 안다. 이제 문제는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가에 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생명이 되고자 하고 그분은 우리를 이기게 할 수 있다. 이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그리스도를 우리의 생명으로 얻을 수 있는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우리 안에 거하게 하여 그분의 생명을 살아 나타낼 수 있는가? 우리가 예수께서 구주라는 복음을 들은 것은 매우 좋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그분을 구주로 얻는가? 우리가 십자가의 구원을 아는 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십자가의 구원과 연결되는가?

 

그러므로 오늘 오후에 우리가 보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가 우리 생명이고 우리를 대신해 우리 안에 사시는가이다. 그러므로 오늘 오후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기로 한다.

 

이 성경 구절에 관하여 우리는 시작이나 끝부분에서부터 말하지 않고 중간에서부터 말하겠다. 보라, 이 구절에 매우 좋은 한 마디가 있다. 이제는 내가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말한다.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 이 말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의 의미는 바로 이김이다. 이 말은 몇 일 동안 우리가 말해 온 이기는 생명이다. 이기는 생명은 다름이 아니라 첫째는 「내가 아니요」, 둘째는 「오직 그리스도」이다. 이기는 생명은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일단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일 때, 「내가 아니요」에 「오직 그리스도」가 더해질 때 곧 이기게 되고 모든 어려움이 사라진다.

 

어제 우리는 이기는 생명이 곧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임을 보았다. 그러나 오늘 한 가지 문제가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에 이를 수 있는가이다. 우리는 어떻게 이 생명에 이를 수 있는가? 우리는 어떤 길로 가야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자세히 읽어야 한다.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라는 말씀이 중간 부분에 있기 때문이다. 그 앞뒤에 각각 한 마디씩이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어느 시점에서 어느 단계에까지 이른 후에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라고 말했는지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이것을 본다면 그 길로 감으로써 우리도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라고 말할 수 있기 바란다. 그러므로 바울이 거친 것을 우리도 거쳐야 한다. 바울이 사용한 방법이 우리가 사용할 방법이고 그가 걸은 길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다.


어떻게 해야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일 수 있는가

 

이제 우리는 어떻게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가 될 수 있는지를 보겠다. 우리는 첫 마디부터 읽어 보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바울은 어떻게 했기에 내가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라고 말하는 단계에 이르렀는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은 우리가 잘 알고 있다. 「내가 아니요」라는 말은 내가 없어졌다는 것이고 십자가에서 내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내가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우리가 함께 죽었다는 진리는 우리 가운데서 오늘 오후에 처음 들은 것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벌써부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아는바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교리가 우리 몸에서 효력을 발휘하는가?

 

육(陸) 형제님에게 묻겠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교리를 안 지 몇 년이나 되었는가? 육 형제는 십여 년이 되었다고 답했다. 효력이 있는가 없는가? 솔직히 말해 달라. 이것이 당신의 몸에서 얼마나 효력을 발휘했는가? 육 형제는 많지 않다고 말했다. 계(季) 형제, 당신이 알고 있는 십자가의 교리가 당신을 얼마나 인도했는가를 간증해 보라. 효력이 있는가? 바울과 같은 능력이 있는가? 계 형제는 이 이틀 동안에 커졌다고 말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해 주겠다. 십자가에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교리를 안 지 십여 년이 되었지만 내 몸에서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물론 효력이 있긴 있지만 많지 않다. 우리는 바울과 같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라고 말한 다음 뒤이어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 교리가 우리 몸에서 별 큰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 것 같다.

 

그러므로 오늘 오후 나는 다시 십자가의 교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런 일을 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너무 많이 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이 말씀이 우리 몸에서 무엇을 이루기 원하는가를 보아야 한다. 우리가 어떻게 한 다음에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할 수 있는가?

 

형제 자매들이여, 우리가 다 알듯이 십자가에 주님이 못 박혀 죽으심은 우리가 못 박은 것이 아니요 우리가 그곳에서 죽은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분의 죽음 안에 포함시켜 죽게 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다 아는 바이다.

 

그러나 나는 여러 분에게 한 가지 질문하겠다. 하나님이 우리를 못 박혀 죽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어떠한 절차를 거치고 어떤 일을 거쳐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확실히 말할 수 있는가? 과거 수년 동안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하신 것을 보았지만 우리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보지 않았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를 못 박으셨는가를 거듭 보았지만 우리 자신의 못 박힘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오늘 오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에 대해 나의 책임이 무엇인가를 보기로 한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를 받아들임

 

하나님은 왜 그리스도를 못 박았는가? 오늘 오후 나는 말씀을 전하려는 계획이 없고 여러분과 대화를 갖겠다. 이것은 우리 모든 사람의 일이지 나만의 일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모든 사람은 하나님이 왜 나를 주 예수와 함께 못 박았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한 가지 예를 들려주겠다. 한 강도가 법관의 판결을 받을 때 법관은 그의 죄가 무겁지 않으므로 10 년의 징역을 선고한다. 또 어떤 강도에 대해서는 법관이 총살을 선고한다. 당신은 왜 그 사람을 총살하는지 아는가? 왜 한 사람은 십 년 징역이고 또 한 사람은 총살인가? 그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십 년 징역을 선고받은 강도에 대해서는 법관과 국가가 아직도 소망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좋은 국민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에 십년 동안 가둔 후에 다시 풀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강도에 대해서는 국가가 소망을 갖고 있지 않고 그의 죄가 너무 무거우며 국가에 대해 그가 조금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그를 총살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어떻게 보고 계시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왜 그러셨는가? 내가 솔직히 말하지만, 이 말은 그리 듣기 좋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다. 하나님은 당신에 대해 조금도 소망을 갖지 않으시고 소망이 없으시다. 하나님은 당신을 볼 때 당신에 대해 전혀 방법이 없고 당신은 조금도 좋아질 방법이 없다. 당신의 육신은 극도로 패괴하여 참으로 방법이 없고 오직 죽을 수밖에 없는 것으로 보신다.

 

주 예수의 역사는 당신의 육신을 변케 할 수 없고, 하나님의 능력도, 성령도 당신의 육신을 변케 못한다. 당신이 성경을 읽고 기도하여도 당신의 육신을 변케 할 수 없다. 육신으로 난 것은 육신이요 영원히 변하기를 바랄 수 없으며 변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당신의 육신을 죽음 외에는 얻을 것이 없는 것으로 보신다. 하나님이 당신에 대해 소망이 없기 때문에 당신과 나를 그리스도 안에 포함시켜 못 박아 죽게 하셨다. 당신은 죽는 것 외에 달리 소망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요구하시는 첫번째 일이 바로 침례이다. 침례는 하나님이 그에 대해 절망하셨기에 못 박아 죽게 했음을 선포하는 것이다. 침례는 또한 당신이 나는 죽어 마땅한 자이므로 나를 들어 장사하라고 남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당신은 보았는가? 침례는 바로 우리가 죽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선포하고 또한 우리가 시인하는 것이다. 침례는 곧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에 우리가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말할 때 당신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나를 장사하라고 말하는 것이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하여 소망을 갖지 않고 나 자신에게는 조금도 소망이 없기에 나는 죽는 수밖에 없다. 오늘 나는 죽음의 위치에 서 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이 침례받을 때 행한 것을 다 잊어 버렸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 대한 평가가 무엇인지를 잊어 버렸다. 하나님의 평가는 무엇인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곧 죽음이다. 우리는 다만 죽기에 합당하다. 우리는 죽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 당신은 고치려 해도 고칠 길이 없고 때워도 때워지지 않는다. 당신은 진보하려고 해도 진보할 수 없으며 개선하려 해도 할 수 없다. 당신은 죽음 외에 별다른 용도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당신을 주 예수의 죽음 안에 포함시켰다. 그분이 우리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곧 우리에 대한 일종의 평가의 표시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당신과 나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임을 기억하라. 하나님은 이런 표시로서 당신은 조금도 소망이 없고 오직 죽기에 합당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이것을 인정하는가를 묻겠다. 우리 자신에 대해 우리도 모순적인 생각을 가질 때가 있다. 한면에서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한다. 이 말을 우리는 십여 년 동안 말해 왔고 지금도 말하고 있다. 또 한면에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 아직도 소망에 차 있다. 우리는 자신이 할 수 없다고 느끼지만 또 한면에서 자신이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가 약하고 실패했는데도 이길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이런 한 폭의 그림을 본 적이 있다. 남편이 죽은 한 여인이 남편의 관을 자기 집 문 앞에 30여 년간 두었다. 그녀는 묻기를 꺼려했다. 그녀는 지금 남편은 자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부활하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우리 자신에 대하여 우리도 이렇게 바라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몸임을 믿고 자신이 죄 가운데서 죽은 자임을 믿지만 또한 스스로 아직도 호흡할 수 있고 아마 아직도 쓸모가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말하기를 좋아한다. 『이번에는 내 결심이 굳세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다음에 굳세게 결심을 하면 이길 수 있다. 이번에는 깨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다음에 잘 깨어 있으면 설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거절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패했다. 만일 다음에 내가 거절한다면 이길 수 있다. 이번에는 내 기도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다음에 기도를 많이 하면 이길 수 있다.』

 

당신은 이것을 보았는가? 하나님이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너는 죽은 자라고 말씀하셨지만 당신은 당신이 죽은 자임을 보지 못했고 인정하지도 않았다. 당신은 계속해서 이미 꺼진 불이라도 부채질하면 타오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계속 부채질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을 체험하려면 우리 편에 영원히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 필요하다. 그것은 곧 하나님에게 『당신이 나에 대해 실망하셨기에 나도 나 자신에 대해 실망합니다. 당신이 나를 조금도 소망 없다고 보므로 나도 자신을 조금도 소망 없는 것으로 봅니다. 당신이 나를 마땅히 죽을 자로 보므로 나도 자신을 죽어 마땅한 자로 봅니다. 당신이 나를 약한 자로 보므로 나도 내가 약한 자임을 시인합니다. 당신은 내가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고 나도 내가 할 수 없음을 시인합니다.』

 

당신이 이 위치에 서 있는 것을 가리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신 일은 영원히 뒤집을 수 없다. 이미 완성된 것이다. 지금 당신 편에 일부의 책임이 있다. 그것은 곧 그 평가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에 대하여 절망하시고 나도 자신에 대하여 절망한다. 내가 당신에게 말하지만, 언제든지 당신이 자신에 대해 절망할 때 당신은 즉시 「내가 아니요」를 보게 될 것이다.

 

오늘 가장 어려운 점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눈을 감고 하나님이 그들에 대해 소망이 없고 요구가 없으시며 그들이 아무런 쓸모 없는 자임을 보지 못하는 데 있다. 육(陸) 형제, 당신에게 득죄할까 염려하지 않는다. 형제를 가리켜 모든 사람 앞에서 당신은 아무 쓸모 없다고 선포할 수 있다. 이것은 그래도 예의를 갖춰 말하는 것이다. 심하게 말한다면 『육 형제, 당신은 너무 악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한다! 나는 형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다 너무 악하고 아무 쓸모가 없다. 죽음 외에 다른 용도가 없기 때문에 오직 죽는 것만이 길이다. 나라는 사람은 고쳐도 선하게 될 수 없고 아무런 소망이 없다. 너무 악하기 때문에 오직 죽기에 합당하다. 이것이 하나님의 관점이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이것 외에 다른 관점을 갖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많은 관점들을 갖고 있다. 우리는 자신에 대해 소망을 가득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오늘 오후 우리는 한 걸음 더 나가서 실행 방면에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할 수 있는가를 보기로 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절망하셨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는 하나님에게 우리도 자신에 대해 절망했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말하기로 하자. 우리는 잠시 갈라디아서 2장을 한 쪽에 놓고 필요할 때 다시 보기로 한다. 이제 누가복음 18장 18절부터 21절까지를 보자.

 

워치만 니
[이기는 생명, "이기는 생명을 체험하는 길", 한국복음서원]